‘오픈런’ 사라진 백화점, 명품 매장에 줄 서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백화점 문이 열리자마자 원하는 명품을 손에 넣기 위해 질주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오픈런’은 하나의 사회 현상이었죠. 샤넬, 롤렉스 매장 앞은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뤘고, ‘오늘 사는 게 가장 싸다’는 말은 명품 재테크의 상징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길었던 줄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백화점 명품 매장은 한산해졌고, ‘오픈런’이라는 단어조차 어색하게 들립니다. 도대체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오늘, 그 사라진 줄의 행방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명품 시장의 급격한 변화: 통계로 보는 현실

통계는 이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2022년 한국은 1인당 명품 소비액 세계 1위를 기록할 정도로 뜨거운 시장이었습니다. 당시 시장 규모는 약 20조 원에 육박했죠.
하지만 영원할 것 같던 성장세에 제동이 걸렸습니다. 2024년 들어 글로벌 명품 시장은 15년 만에 처음으로 역성장을 기록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고, 한국 시장 역시 그 여파를 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23년까지 두 자릿수 성장을 이어가던 국내 명품 시장 성장률은 2024년 들어 한 자릿수로 뚝 떨어졌고, 2025년에는 거의 정체될 것으로 보입니다.

백화점의 위기 신호

특히 명품 소비의 상징과도 같았던 백화점의 위기 신호는 더욱 뚜렷합니다. 2024년 1분기, 주요 백화점들의 매출은 일제히 감소세로 돌아섰습니다. 물론 전체 매출은 소폭 올랐지만, 이는 식품이나 일부 카테고리의 선방 덕분이었고, 핵심 동력이었던 패션과 명품 부문은 힘을 잃었습니다.
심지어 현대백화점 디큐브시티점처럼 아예 문을 닫는 점포까지 생겨나고 있죠. 한때 백화점의 ‘효자’였던 명품 매장이 이제는 ‘애물단지’가 될 수 있다는 경고등이 켜진 겁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명확해집니다. 사람들은 정말 명품에 대한 관심을 끈 걸까요? 아니면, 그들의 욕망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있는 걸까요?

명품 소비 변화의 세 가지 핵심 동력

1. 거시 경제의 압박: 고금리와 인플레이션

이 거대한 변화의 뒤에는 크게 세 가지 핵심 동력이 숨어있습니다. 첫 번째는 바로, 우리 지갑을 옥죄는 거시 경제의 압박입니다.
끝없이 오를 것 같던 자산 가격은 주춤하고, 고금리와 인플레이션은 현실이 됐습니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대출금리가 1%포인트 오르면 가구의 원리금 상환 부담, 즉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은 평균 1.9%포인트나 증가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DSR이 1%포인트 늘어날 때마다, 우리 소비는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부동산 시장 침체로 자산 가치가 하락하면서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취해 소비하던 ‘자산 효과’도 사라졌습니다.
한마디로, 이제는 명품 가방 하나를 사기 전에, 다음 달 카드값과 대출 이자를 먼저 걱정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겁니다.

2. 소비 패러다임의 전환: 과시에서 경험으로

두 번째 원인은 소비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과시’에서 ‘경험’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고 있는 것이죠.
특히 명품 시장의 큰 손으로 떠오른 MZ세대는 더 이상 로고가 크게 박힌 가방을 드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럭셔리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나’를 위한 특별한 경험과 가치를 의미합니다.
디올이 성수동에 거대한 팝업스토어를 열고, 구찌가 서울에 레스토랑을 오픈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명품 브랜드들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것을 넘어, 브랜드의 철학과 스토리를 경험하게 만드는 데 사활을 걸고 있습니다.

3. 중고 시장과 온라인 플랫폼의 폭발적 성장

마지막 세 번째 동력은, 똑똑해진 소비자들이 찾아낸 새로운 대안입니다. 바로 중고 시장과 온라인 플랫폼의 폭발적인 성장입니다.
“굳이 새 제품을 살 필요가 있을까?” 이런 생각, 한 번쯤 해보셨을 텐데요. 실제로 국내 중고 명품 시장은 연평균 40% 이상 성장하며 2025년에는 약 3조 원에 육박할 전망입니다.
더 이상 중고는 ‘남이 쓰던 헌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합리적인 가격에 명품을 경험하고, 또 사용하던 제품을 팔아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스마트한 소비’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무신사, 29CM 같은 온라인 패션 플랫폼들은 백화점보다 훨씬 다채롭고 트렌디한 상품들을 선보이며 젊은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백화점까지 가지 않아도, 손가락 몇 번만으로 전 세계의 명품을 쇼핑하고, 심지어 빌려서 써볼 수도 있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현장의 목소리: 구체적인 사례들

사례 1: 직장인 A씨의 변화

직장인 A씨는 최근 몇 년간 모아온 명품 가방 3개를 모두 중고 플랫폼을 통해 판매했습니다.
“예전에는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무리해서라도 샀지만, 이제는 그 돈으로 차라리 여행을 가거나 새로운 취미를 배우는 게 더 만족스럽다”
A씨처럼 소유보다는 경험에 가치를 두는 이들이 늘면서, ‘명품 재테크’는 옛말이 되고 있습니다.

사례 2: 대학생 B군의 ‘듀프(Dupe)’ 소비

대학생 B군은 ‘듀프(Dupe) 소비’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는 수백만 원짜리 명품 스니커즈 대신, 디자인은 거의 흡사하지만 가격은 10분의 1 수준인 브랜드를 구매합니다.
“어차피 유행은 금방 변하는데, 비싼 돈을 주고 명품을 살 이유를 모르겠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트렌드를 즐기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
이런 ‘듀프’ 열풍은 단순한 ‘짝퉁’ 소비와는 다릅니다. 정품을 속여 파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대체품’임을 당당히 밝히고, 가성비를 중시하는 새로운 소비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죠.

사례 3: 명품 브랜드의 전략 변화

명품 브랜드들의 움직임도 발 빠릅니다. 이들은 더 이상 백화점 매장에만 의존하지 않습니다.
서울 청담동과 성수동 일대는 이제 명품 브랜드들의 ‘경험 마케팅’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공간을 넘어, 브랜드의 정체성을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플래그십 스토어, 카페, 심지어 레스토랑까지 선보이며 소비자들의 발길을 끌고 있습니다.
백화점의 문턱을 넘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명품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변화가 의미하는 것: 세 가지 시사점

1. ‘획일적인 과시’의 시대가 저물고 ‘다원적인 가치’의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남들이 모두 원하는 ‘그 가방’을 갖는 것보다, 나만의 기준과 취향에 맞는 경험과 만족을 추구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2. 소비의 주도권이 공급자에서 소비자에게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온라인 플랫폼과 중고 시장의 성장은 소비자에게 더 많은 선택권과 정보를 주었습니다. 이제 소비자들은 더 이상 브랜드가 정해놓은 가격과 유통 방식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3. 럭셔리 시장의 ‘민주화’를 의미합니다

더 이상 명품은 소수 상류층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렌탈, 중고, 스몰 럭셔리, 듀프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누구나 자신의 경제적 수준에 맞게 럭셔리를 ‘경험’하고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결론: 사라진 줄의 행방

백화점 앞에서 사라진 줄은 결코 ‘소멸’한 것이 아닙니다. 그 줄은 이제 온라인 쇼핑몰로, 개성 있는 편집샵으로, 활기 넘치는 중고 거래 플랫폼으로, 그리고 우리 각자의 다채로운 일상 속 경험으로 흩어져 스며들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무엇을 소유했는가’로 나를 증명하던 시대를 지나, ‘무엇을 경험하고 어떻게 살아가는가’로 나를 표현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명품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그리고, 여러분의 진짜 ‘럭셔리’는 무엇인가요?

주요 통계 한눈에 보기

항목
수치
한국 명품 시장 규모 (2022년)
약 20조 원
1인당 명품 소비액 (2022년)
325달러 (세계 1위)
중고 명품 시장 연평균 성장률
40% 이상
2025년 중고 명품 시장 규모 예상
약 3조 원
무신사 2024년 거래액
4.5조 원
29CM 2024년 거래액
1조 원 이상
글로벌 명품 시장 성장률 (2024년)
-2% (15년 만의 역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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